날마다 태어나는 삶
한 젊은이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나면, 그는 사내(社內)에서 신입사원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기존에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고정된 입장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입(新入)사원을 맞이하고 있는 담당 과장(課長)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 또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입사원을 대하는 과장도 이전까지 전혀 없던 새로운 관계(關係)에 의해서 새로운 입장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입사원만 신입이 아니라, 신입사원에게는 과장이 신입과장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현상은 상호(相互)연관에 의해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사실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의 첫 만남인 탄생이라는 사건에서부터 발생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부모(父母)가 자식을 낳습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보면 부모가 있으니 자식이 있다는 것도 되지만, 누군가가 부모 소리를 들으려면 자식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자식이 없는 부모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를 뒤집어 보면, 자식도 부모를 낳고 있다는 얘기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상식을 인정하고 보면, 자식과 부모는 동시에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모나 고모는 또 어떻고요? 이른바 사돈의 팔촌까지 세상과의 온갖 관계가 동시(同時)에 다 태어납니다. 그래서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온 우주(宇宙)가 더불어 태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면, 네 명의 자식을 두고 있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딱 1/4만큼씩 사랑한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까? 자식 하나하나마다 완전한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지, 쪼개진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모든 생명의 숫자만큼 나눈 사랑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특별히 은혜를 더 받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다만 무진장(無盡藏)일 따름입니다.
행여 부처님의 돌보심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어도, 부처님은 결코 그 또는 그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못난 짓을 한다고 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않으려는 심정과 유사합니다. 대개의 경우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일반사람들끼리의 관계에 비해 상당히 다른 관계를 맺습니다. 이해관계(利害關係)를 앞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보다 확실해야 합니다. 세상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개체로서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즉 중생심(衆生心)의 허구를 쫓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생명들과 단절된 자신이 있는 한, 뒤틀린 모습을 면치 못합니다. 모든 관계가 대립(對立)구도로 설정되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흔히 ‘너 때문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말미암아 세상의 분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고정된 상태로 놓고 저쪽을 설정하는 인과법칙(因果法則)에 따라 그럴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바대로 나타나는 현실’이 갖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믿는바 현실은 결정된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은 현상을 짓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육신(肉身)이 아니며 물질(物質)도 아닙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위대한 부처님생명이고, 부처님생명은 지금도 활동(活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단지 그것을 단절해서 스스로 제한(制限)시키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잠가 놓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나온다고 한탄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스스로 물의 흐름을 막은 결과입니다.
수도꼭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수도를 공급하는 국가기관이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물은 이상 없이 공급되고 있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은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간(天地間)에 가득 찬 부처님생명이, 세상살이마다 무한히 드러나고 있는 게 진정한 현실(現實)인데 말입니다.
영화관(映畵館)에서 화면을 볼 수 있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불을 다 켜놓은 상태에서 영화 상영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불을 끕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영상이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불을 켭니다. 더 이상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삶의 갖가지 현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만 무엇이든 나타납니다. ‘어이구! 나같이 박복(薄福)한 사람이 어디 있어?’ 아! 나는 인덕(人德)도 없나 봐’ 하는 넋두리는, 한 편의 영화감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상영되는 필름을 계속 돌리면서,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제한된 현실은 참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영화관에서 상영된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동일시(同一視)하다가, 극장 문(門)을 나와 보니 온통 대명천지(大明天地)입니다. 공포영화에 나왔던 무서운 괴물이나 귀신 또는 흉기를 든 포악한 살인자도 없습니다. 빛나는 광명(光明) 앞에 어떤 현상의 그림자도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특정한 모습이나 상태를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이기에, 그런 현상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현상을 무시하자는 게 아닙니다. 현상은 말 그대로 ‘믿는바 그대로 마주한 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은 비교(比較)할 새가 없습니다. 무엇인가와 비교가 가능한 것은 물질 또는 고정된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엄연한 진실만 있기에 그렇습니다.
1회적이거나 일시적인 관계로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한시도 멈춤 없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것도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지난날만 그렇겠습니까?
그 날이 언제이든 우리는 날마다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것도 현상적인 관계가 아닌, 참생명의 위대한 능력인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몸과 말과 뜻으로 감사할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좋은 날임은 당연합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2011 해외구도여행중..법문하시는 여여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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