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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을 여니 안팎이 없네

문사수 2010.11.18 조회 수 23397 추천 수 0

문(門)을 여니 안팎이 없네

 
온갖 문(門)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궐의 웅장한 문이나 오막살이의 싸리문은 물론이고 입시의 문, 취직의 문, 결혼의 문 등 수많은 이름의 문들 말입니다. 심지어는 생사의 문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문들이 옆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가 봅니다. 간혹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흘낏 쳐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끝내 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은 단순히 객관적인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가가는 사람의 심리적인 상태가 문의 정체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을 세워서 삶의 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묵묵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주문은 일반적인 문과는 사뭇 다릅니다. 큰 기둥으로만 세워져 있습니다. 이는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은 본래 하나라는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안과 밖을 구분 짓고 있으면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안은 밖이 될 수 있고 밖은 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둘이면서 하나인 너와 내가 구별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일주문만 이겠습니까?
 집안에 있는 사람이 방문객에게‘들어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방문객의 입장에서는‘나오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주로 놓고 본다면 저쪽 사람은 문을 통과해야 될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저쪽의 사람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수많은 문들이 고정된 듯하지만, 문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객관적인 실체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은 구도심(求道心)에 불타는 선재동자가 참된 가르침을 찾아 선지식을 찾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첫 대목은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이 쪽으로 가라’는 지시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묘봉산(妙峰山)에 가면 한 선지식(善知識)이 있다. 그 선지식을 만나라”
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가리킨 방향이 남쪽이므로, 이에 말미암아서 삶의 바른 지침을 일컬을 때 지남(指南)이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미난 일이 벌어집니다.
 묘봉산이란 곳에 막상 도착한 선재는 당황하고 맙니다. 묘봉산이라는 지명(地名)은 틀림없는데, 거기에는 그렇게도 만나고 싶은 선지식인 길상운 비구가 없는 게 아닙니까?
 실제로 이런 일은 선재만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산에 갔다고 합시다.
 어디서부터 일러 북한산이라고 하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구파발 입구서부터 북한산으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북한산 유원지부터로 보기도 하고,  “아니다. 저 위에 있는 매표소부터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가 북한산입니까?
 어째 한참 복잡한 듯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역시 산을 한참 다닌 분들은 담담한 어투로 이런 말을 합니다.
 “산은 역시 산이다.”
 
 선재가 묘봉산이라고 알고 갔던 그곳에 선지식이 계셔야 하는데, 길상운 비구가 안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알고 있는 묘봉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읽은 책에 담긴 지식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그런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나름의 틀을 갖고 그곳에 가봐야 그곳은 내가 생각한 곳과는 십만 팔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결국 묘봉산에 갔는데 묘봉산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묘봉산의 주인인 길상운비구 또한 없기에 선재동자가 당황한 것입니다.
 이때 선재동자는 이레 동안을 헤매다가 마침내
 “내가 생각했던 묘봉산은 이름을 불러 묘봉산이지, 알고 보니 묘봉산 그 자체는 아니더라”
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선재는 지남(指南)의 진정한 의미에 충실한 구도자입니다.
 자신이 찾는 묘봉산의 관념을 버리자마자 길상운 비구가 본래 그 자리에 있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선재가 먼저 앞에 나아가 두 발에 예배하고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서 합장(合掌)합니다. 그리고는 청법(請法)을 합니다.
두발에 예배한다는 말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발등에다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하면서 발등에다 키스를 한다는 것은, “제 생명을 당신께 다 맡깁니다”
하는 결의(決意)를 뜻합니다. 
 
 법우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진짜로 완전히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완전히 믿고 목숨을 다 내맡겼을 때, 너와 나의 대립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됩니다. 이렇게 자기 삶을 다 맡기고서야 우린 선지식을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식은 무슨 박사학위 몇 개 가지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식일 수 있고, 이웃일 수 있으며, 청소부 아저씨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내가 나만의 문(門)을 열면 그 사람은 선지식으로 다가옵니다.
 혹은 깡패로 불릴 수도 있고, 도둑놈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상대적인 평가일 뿐 나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선지식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라고 했습니다.
 선지식은 나에게 참생명의 길을 열어줄 무한한 가르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진리의 방향이 설정이 되고, 진리의 방향인 오른쪽으로 돌면서 합장 공경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합장하면서
 “우린 한 생명입니다. 내가 당신이요, 당신이 나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한 생명 안에서 얘기합시다”
하는 뜻으로 말이지요.
 어떤 전제된 것, 즉 각자의 문(門)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한 만남은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합장하는 마음속에서 너와 나라는 대립 구도가 허물어지면서, 선지식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했을 때, 진정으로 귀의하는 이런 마음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선지식은 100%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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