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念佛로 눈을 뜨니, 살만 하구나!
생각만으로 살 수 있을까?
두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생각은 과거에 굳어져 있는 자신에 지나지 않으니, 별로 믿고 의지할 바가 못 됩니다. 자기한정(自己限定)이나 자기부정(自己否定)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생각의 범주를 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생각인데 어떻게 하겠어?’ 또는 ’남들도 다 그런데 뭐?’ 하는 넋두리나 하면서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상일까?
이런 상태를 불가(佛家)에서는 습(習)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갖고 있는 습을 떼기가 세상살이 가운데 가장 힘들다고도 합니다. 어느 누가 따로 나누어주거나 강요한 적도 없지만,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겠거니 하면서 살아갑니다. 말버릇이나 행동거지까지를 포함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모든 것들을 합친 결과가 습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하고나면, 다시 말해서 습이 되고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천연덕스레 잘도 살아갑니다. 해서 어머니의 말투가 싫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그 말투가 어머니의 말투를 쏙 빼닮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아버지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갈등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행실로 행패를 부리는 모순(矛盾)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는 자신의 습을 도저히 어쩌지 못한다는 방증(傍證)입니다.
자, 그럼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단순하게 물어봅시다.
그것이 언제 몸과 마음에 배였든 생각에 뿌리박은 습을 어떻게 다루어야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살겠다고 하기에는 영 찜찜하고, 어찌해 보려고 하니 당최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한데 말입니다.
나름대로 한참 쓰다가 더 이상 소용없다고 여겨지면, 이때부터 쓰레기로 분류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릴 때 품목이나 가짓수를 세면서 버립니까?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일일이 기록하며 버리느냐 이겁니다. 물론 아니겠지요.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가꾸며 아끼던 머리카락이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냉큼 집어 쓰레기통에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저분해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습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보면,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본래부터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해가 뜨면 깜깜한 상태 즉 어둠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처럼 삶을 짓누르던 습은 일거에 사라질 뿐입니다. 따라서 습을 조금씩 개선(改善)해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개혁(改革)도 아니고 개선도 아닙니다. 자신의 정해진 입장이나 버릇과 같은 습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혁명(革命)만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상대적(相對的)인 습을 뒤집으라는 절대절명의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당연시해오던 물질(物質)로서의 생명이라는 가치관에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생명으로서의 나를 깨닫지 않는 한, 중생으로서의 나 또는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내가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망상일 따름입니다. 생명의 법칙에 조금씩 나아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전기스위치만 올리면 됩니다. 스위치만 올리면 어둠은 동시에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본래 있던 게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어둠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밝은 불을 켜도 그 어둠은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염불공양(念佛供養)을 하면,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갖는 공덕(功德)의 근본으로부터 빛이 나옵니다.
빛이라고 하니까, 형광등빛과 같은 빛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빛을 보았다거나, 빛에 감싸였다고 하던데, 그거 다 사이비(似而非)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나를 중심에 두고 파악되는 어떤 현상도 상대적인 수준을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불로부터는 그런 사이비 광명이 아니라 참생명의 빛이 나옵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우담바라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 이외의 바깥에서 무엇인가를 덧붙여 보려는 생각에 젖은 습(習)은 이미 어둠에 익숙합니다. 그렇게 어둠속에서 또 다른 어둠을 아무리 많이 잡는다고 해서 밝아지는 게 아닙니다. 어둠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염불(念佛)로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밝혀지면 그만입니다.
다음에 깨닫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시간나면 염불한다는 게 아닙니다. 공덕의 근본으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언제? 바로 지금입니다. 어디서? 바로 이곳에서입니다.
공덕의 근본에 말미암아 사는 나는 이제 빛이 됩니다. 어둠의 반대인 빛이 아니라, 오직 빛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나 사물마다 유용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머그잔을 커피 먹는 용도로만 쓰겠다는 사람한테는 커피잔밖에 안되겠지만, 연필꽂이로도 쓰겠다는 사람과 같이 다른 용도로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밥을 꼭 밥공기에다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좋습니다. 자신의 참생명에 눈뜬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한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불편합니다.
이렇게 염불로 눈뜨고 보면 항상 무한공급이 이뤄집니다.
따라서 굳이 자유(自由)를 구하고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아 살기에 아무것도 잃을게 없다’는 뜻의 의미로 본다면, 본래부터 자유인(自由人)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날마다 아무것도 잃을게 없는,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나에게 걱정과 근심이 따라붙을 새가 없습니다. 자유인만이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 아닌 한 인생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아마 조선시대의 종살이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 있고 있기에, 종문서를 따라서 돌아다니는 처지였습니다.
이제 제발 종살이는 그만 합시다.
육체의 종살이, 자식의 종살이, 부모의 종살이, 벼슬의 종살이, 돈의 종살이 등 예를 들자면 일상적으로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들입니다. 내가 그런 조건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몸을 갖고 써야 하고, 돈을 갖고 써야 하며, 자식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야 하고, 부모님 잘 모시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매여 살아야 합니까? 생각에 근거한 습을 가지고 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執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누리면서, 스스로 소유되는 게 아니라 그 삶을 베풀고 사는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칫 무한공급(無限供給)이라고 하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법장(法藏)비구의 원(願)을 자기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무아미타불하는 것은 법장비구의 원이 이미 이루어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셨듯이,
“모든 공덕의 근본은 완전한 성취되어 있구나!”
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감사(感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염불행자여! 그대는 참으로 인생의 주인이고, 자유인으로써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염불법문을 들려주어서, 갖가지 생각의 그림자인 습(習)에 매여 종살이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셔야 할 당사자라는 말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생각만으로 살 수 있을까?
두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생각은 과거에 굳어져 있는 자신에 지나지 않으니, 별로 믿고 의지할 바가 못 됩니다. 자기한정(自己限定)이나 자기부정(自己否定)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생각의 범주를 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생각인데 어떻게 하겠어?’ 또는 ’남들도 다 그런데 뭐?’ 하는 넋두리나 하면서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상일까?
이런 상태를 불가(佛家)에서는 습(習)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갖고 있는 습을 떼기가 세상살이 가운데 가장 힘들다고도 합니다. 어느 누가 따로 나누어주거나 강요한 적도 없지만,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겠거니 하면서 살아갑니다. 말버릇이나 행동거지까지를 포함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모든 것들을 합친 결과가 습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하고나면, 다시 말해서 습이 되고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천연덕스레 잘도 살아갑니다. 해서 어머니의 말투가 싫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그 말투가 어머니의 말투를 쏙 빼닮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아버지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갈등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행실로 행패를 부리는 모순(矛盾)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는 자신의 습을 도저히 어쩌지 못한다는 방증(傍證)입니다.
자, 그럼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단순하게 물어봅시다.
그것이 언제 몸과 마음에 배였든 생각에 뿌리박은 습을 어떻게 다루어야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살겠다고 하기에는 영 찜찜하고, 어찌해 보려고 하니 당최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한데 말입니다.
나름대로 한참 쓰다가 더 이상 소용없다고 여겨지면, 이때부터 쓰레기로 분류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릴 때 품목이나 가짓수를 세면서 버립니까?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일일이 기록하며 버리느냐 이겁니다. 물론 아니겠지요.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가꾸며 아끼던 머리카락이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냉큼 집어 쓰레기통에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저분해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습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보면,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본래부터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해가 뜨면 깜깜한 상태 즉 어둠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처럼 삶을 짓누르던 습은 일거에 사라질 뿐입니다. 따라서 습을 조금씩 개선(改善)해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개혁(改革)도 아니고 개선도 아닙니다. 자신의 정해진 입장이나 버릇과 같은 습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혁명(革命)만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상대적(相對的)인 습을 뒤집으라는 절대절명의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당연시해오던 물질(物質)로서의 생명이라는 가치관에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생명으로서의 나를 깨닫지 않는 한, 중생으로서의 나 또는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내가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망상일 따름입니다. 생명의 법칙에 조금씩 나아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전기스위치만 올리면 됩니다. 스위치만 올리면 어둠은 동시에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본래 있던 게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어둠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밝은 불을 켜도 그 어둠은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염불공양(念佛供養)을 하면,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갖는 공덕(功德)의 근본으로부터 빛이 나옵니다.
빛이라고 하니까, 형광등빛과 같은 빛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빛을 보았다거나, 빛에 감싸였다고 하던데, 그거 다 사이비(似而非)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나를 중심에 두고 파악되는 어떤 현상도 상대적인 수준을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불로부터는 그런 사이비 광명이 아니라 참생명의 빛이 나옵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우담바라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 이외의 바깥에서 무엇인가를 덧붙여 보려는 생각에 젖은 습(習)은 이미 어둠에 익숙합니다. 그렇게 어둠속에서 또 다른 어둠을 아무리 많이 잡는다고 해서 밝아지는 게 아닙니다. 어둠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염불(念佛)로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밝혀지면 그만입니다.
다음에 깨닫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시간나면 염불한다는 게 아닙니다. 공덕의 근본으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언제? 바로 지금입니다. 어디서? 바로 이곳에서입니다.
공덕의 근본에 말미암아 사는 나는 이제 빛이 됩니다. 어둠의 반대인 빛이 아니라, 오직 빛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나 사물마다 유용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머그잔을 커피 먹는 용도로만 쓰겠다는 사람한테는 커피잔밖에 안되겠지만, 연필꽂이로도 쓰겠다는 사람과 같이 다른 용도로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밥을 꼭 밥공기에다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좋습니다. 자신의 참생명에 눈뜬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한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불편합니다.
이렇게 염불로 눈뜨고 보면 항상 무한공급이 이뤄집니다.
따라서 굳이 자유(自由)를 구하고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아 살기에 아무것도 잃을게 없다’는 뜻의 의미로 본다면, 본래부터 자유인(自由人)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날마다 아무것도 잃을게 없는,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나에게 걱정과 근심이 따라붙을 새가 없습니다. 자유인만이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 아닌 한 인생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아마 조선시대의 종살이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 있고 있기에, 종문서를 따라서 돌아다니는 처지였습니다.
이제 제발 종살이는 그만 합시다.
육체의 종살이, 자식의 종살이, 부모의 종살이, 벼슬의 종살이, 돈의 종살이 등 예를 들자면 일상적으로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들입니다. 내가 그런 조건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몸을 갖고 써야 하고, 돈을 갖고 써야 하며, 자식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야 하고, 부모님 잘 모시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매여 살아야 합니까? 생각에 근거한 습을 가지고 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執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누리면서, 스스로 소유되는 게 아니라 그 삶을 베풀고 사는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칫 무한공급(無限供給)이라고 하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법장(法藏)비구의 원(願)을 자기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무아미타불하는 것은 법장비구의 원이 이미 이루어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셨듯이,
“모든 공덕의 근본은 완전한 성취되어 있구나!”
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감사(感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염불행자여! 그대는 참으로 인생의 주인이고, 자유인으로써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염불법문을 들려주어서, 갖가지 생각의 그림자인 습(習)에 매여 종살이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셔야 할 당사자라는 말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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