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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의 옷을 벗자

문사수 2010.06.06 조회 수 29972 추천 수 0
타성의 옷을 벗자

아무리 참신하던 느낌도 시간의 흐름 따라 무뎌지기 마련인가?
 가슴을 애태우던 첫사랑의 두근거림은, 켜켜로 쌓이는 만남의 무게에 눌리다가는 어느새 아스라한 추억의 창고에서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맙니다. 새로 옷을 사 입고 나선 날의 어색함은, 거리를 뒤덮는 신상품의 엄청난 위력 앞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다가 기성복의 당당함으로 바뀌고 말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처음 부처님과 만났을 때를 되돌아봅시다.
 먹구름에 뒤덮인 어둠을 가르며 내리꽂는 번개마냥 그 얼마나 강렬한 전율로 다가왔던가요? 움츠렸던 가슴으로는 감히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치던 기쁨의 물결은 온갖 걱정과 근심을 한순간에 쓸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일상화된 신심이 되면서부터는 무감동(無感動)의 연속입니다. 찬탄의 시간은, 감사의 공간은 이제 조급하고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경이와 궁금으로 다가왔던 감동은 오늘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먼 옛날의 기억인양 아사무사 사라져 간 것이지요.
 그래서 타성(惰性)에 젖은 인생에게서는 이제 더 이상의 생동감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있는 대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굳어진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에 말미암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이없는 강도를 볼까요?
 남미 어느 나라에서 은행을 성공적으로 턴 강도가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넘치는 대낮에 담도 크지, 태연스레 복면을 뒤집어쓰고 은행에 들어가서는 가져간 자루에 돈을 가득 채운 강심장의 소유자였습니다. 일을 마친 이 사람은 유유히 현장을 떠나 지나는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여기까지는 일이 잘 진행되는 듯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습니다. 자신이 가리킨 목적지와는 달리 경찰서로 직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 할 새도 없이 강도의 손에는 차가운 수갑이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럼 택시기사는 어떻게 성공한 줄 알고 안심했던 강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일을 마쳤으면 복면을 벗었어야 했는데, 그만 깜박 잊고 복면을 쓴 채로 택시에 올라탔던 것이지요. 그러니 삼척동자라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구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는 순간 생명은 위축됩니다.
 굳어진 몸으로는 제 아무리 뛰어난 운동선수라도 평소 기록을 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시험을 보는 학생이 성적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면 그나마 알고 있던 답도 쓰지 못하고 말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주변의 여건을 탓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굳이 눈을 크게 뜰 것도 없습니다. 귀를 쫑긋거릴 것도 없습니다.
 생명은 자신의 불멸성(不滅性)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드러냅니다.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본래의 모습일 따름입니다. 가파른 절벽의 척박함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바위의 틈새를 비집고 오연히 서있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의 생명은 말합니다.
 “무엇이 신비하단 말인가?”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땅의 삭막함을 털어버리려는 듯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의 생명은 말합니다.
 “무엇이 신비하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신비라는 영역을 설정하고는 쉽게 도망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굳어진 기준설정에 말미암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즉 자신이 믿을 수 있을 만큼의 범주를 먼저 설정하고, 그 범주에 들지 않으면 신비라는 뿌연 용어를 동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낙락장송과 잡초를 봅시다.
 얼핏 보기에 연약해 보이는 그것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단 말인가요?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풀도 그냥 풀이 아닙니다. 나무와 풀에 담긴,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무와 풀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의 힘일 뿐입니다. 이 생명의 힘이 나무의 인연 따라 나무가 되고, 풀의 인연 따라 풀이 되면서 그 생명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현상을 일러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사는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먹고 마시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음식물 가운데에 우리를 지탱하는 생명력이 담겨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음식물 자체가 우리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생명력이 우리가 먹고 마시는 순간 우리의 생명력으로 표현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고정된 모습을 갖지는 않지만 모든 생명현상에 두루 하면서 항상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우리 참생명의 실제인 것입니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생명을 단락화한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생명의 무한한 관계는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특정의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시킬 때는 고정된 것으로 보일 따름입니다.
 혹간 누군가 죽음을 이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월간지를 장식하는 기사가 눈에 띕니다. 대개의 내용은 죽을 병에 걸렸던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삶을 받았다는 유쾌한 것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기사를 대하는 일반의 시각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그 사람은 이미 죽을 사람이었는데, 바깥에 있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이제까지 없던 생명력을 새로이 부어주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앞에서 지적하였습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생명의 수준은 나무나 풀을 막론하고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계기로 해서 시작된 착각, 다시 말해서 자신을 고정화하고 무한한 생명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부터 이상(異常)이 발생한 것이지요.
 한참 출세가도를 잘 달리던 사람이, 겉으로만 본다면 건장한 스포츠선수 같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주저앉고 마는 것은 생명의 흐름을 스스로 멈춘데 기인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생명의 흐름을 단절하고는 자신 만의 것으로 고정화하였기에, 이로부터 생명력은 더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빈 아파트에 잠입한 한 좀도둑이 있었습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집안을 살피던 이 도둑. 마침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장롱서랍을 여는 등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가져간 자루에 제법 푸짐하게 담았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요? 자, 도망은 가야겠는데 앞에는 주인이 들어 올 테니 갈 데라고는 베란다 밖에 없다는 판단이 섭니다. 헌데 이때 주인이 베란다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납니다.
 어쩔 줄 모르던 이 도둑. 할 수 없이  베란다 난간에 매달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 어떻게 계속 매달려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떨어져 죽을 것이냐. 아니면 구원을 요청해서 잡힐 것이냐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래도 죽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살려주세요!” 이때서야 정황을 안 집주인이 경비원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내쉬던 도둑. 놀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누군가 등을 툭툭 치기에 돌아보니 경비원이 등 뒤에 서있는 게 아닌가요?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알고 보니 그 아파트는 1층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를 믿지 않는 사람은 조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명은 조건화된 상황에서는 그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속성 그 자체는 무한한 흐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죽을병에 걸렸던 사람이 병석을 차고 일어서는 것은, 본래부터 갖고 있던 건강한 생명상태를 자각하는데서 가능한 일이지요.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겉으로야 누군가를 치료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치료받을 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력이 일깨워지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다가 온 인연이기에 환자는 자신과 분리된 생명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범주에 들어 온 한,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추를 재배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씨를 뿌리고 싹이 터서 마침내 탐스런 배추 한 포기를 손에 안을 때까지 농사꾼이 하는 일은 배추의 성장 자체와는 궤를 달리 합니다. 혹시 급한 마음에 어렵사리 돋아난 싹을 잡아당긴다고 해서 배추가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잎이 나고 줄기가 뻗는 시기를 지정할 자격도 권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배추의 성장을 돕기 위해 비료를 주고 김을 매다가 수확의 때를 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힘을 배추로부터 공급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명을 주격(主格)으로 놓고 볼 때, 세상에 나타난 어떤 생명현상도 주격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무도 풀도, 환자도 의사도, 배추도 농사꾼도 오로지 주격으로서의 생명일 따름입니다. 때문에 이 주격으로서의 생명은 인연의 때와 곳에 따라 정원의 장미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산골 깊숙한 곳에서는 칡넝쿨로도 나타납니다.
 만약 이런 생명의 흐름을 망각한 채로 스스로를 고정화시킨다면 제멋대로 생명의 가치를 논단하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된 시기를 우리 불교에서는 말법(末法)시대라고 하지 않던가요?
 따라서 알아야 합니다. 말법의 고통에 신음한다는 것은 자신의 완전한 참생명 가치에 눈감고 있기에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라는 사실을...

오늘도 온갖 타성이 우리의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습니다.
 생명의 감각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를 옭죄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우리 참생명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자승자박입니다. 다른 어떤 힘도 생명의 위대한 힘을 가두거나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고정화 하는 데 길들여진 타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몸에 배었거나 생각에 스며들었거나 타성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순간, 생명은 활동의 가능성을 잃고 맙니다.
 산다고 하는 게 무엇인가요?
 날마다 가는 곳마다 생명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벗읍시다. 순간마다 곳곳마다 벗어젖힙시다. 나의 참생명에 달라붙는 타성의 옷들을...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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