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우리는 틈만 나면 거울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손거울이든 전신거울이든 크기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안방에서만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까지 거울을 마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울 자체를 바라보고자 함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자 할뿐이지요.
우리가 믿음을 입에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대상으로 여긴다면, 믿음의 내용은 실제의 삶과는 전혀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행복과 불행이라는 잣대로 규정해 놓고 아무리 열심히 믿어 보아야, 그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든 자기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마음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입니다. 즉 인정한 만큼의 자기 생명내용이 믿음이기에, 믿어서 펼쳐지는 결과로서의 세계 보다는 근원적인 데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특수한 물음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되는 물음으로서 삶의 근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요.
따라서 삶의 중심인 부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바라보는 상대의 입장에 서 계신 분이 아닙니다. 과거 3000년 전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의 문제가 있는 한,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간이 만족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로 3000년 후에도 문제가 있는 한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런 끝없는 문제들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모순들을 완전히 해결하는 근본에 자리하십니다. 아니 보다 정학하게 말한다면, 근본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당마다 모시고 있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봅시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화려합니다. 넉넉합니다.
뭐라고 한 두 마디 말로 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온갖 삶의 실현으로 와 닿습니다. 어떨 때는 인자하신 어머니와 같이, 또 어떤 경우에는 다정한 연인과 같은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부족함이라든가, 불평과 같은 속기(俗氣)를 말끔히 씻어 낸 모습입니다.
그럼 관세음보살은 왜 이런 모습으로 자리할까요?
무한한 우리의 생명이 완전하게 성취된 상태를 나타내다 보니,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救濟)를 따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구제된 것이 바로 우리네 삶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偶像)도 아니고 특별한 엘리트들의 독점도 아닌 평등한 생명임을 시사하면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생명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누구나의 마음에 있는 자비와 지혜의 힘을 드러냅니다. 완전하기에 아름답고, 성취가 항상하기에 의젓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참생명을 찾는 모든 구도자(求道者)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관세음보살의 나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의 괴로움을 제3자의 입장에 서서 관찰하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괴로움에 녹아들어, 그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괴로워하는 그 사람과 자기를 함께 구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修行)하신 내용을 가리킵니다.
또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있지 않기에 자재(自在)한 관찰을 하게 됩니다.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부르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자신답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주체와 객관의 현상이 따로 있지 않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진실이기를 바라는 사건이나 사물만을 말하는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우리의 일생만을 본다면 수십 년의 세월을, 그리고 인류가 살아온 날들을 감안한다면 수백만 년을 말입니다.
이렇게 단 하루도 자신을 마주하지 않기에, 보통사람들의 나날은 온갖 공포(恐怖)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혹은 자신을 일러 죄인(罪人)이라고 하고, 혹은 팔자(八字)가 나쁜 사람이라는 투로 너무나 쉽게 우리의 참생명을 모독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살아 주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무서운 신(神)이 있다고 그것이 내 인생 자체를 어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렇게 삐뚤어진 삶에 대한 여지없는 단절(斷絶)에 있습니다.
아닌 것을 가지고 맞다고 하고,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무책임한 세상풍조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뒤집혀진 망상을 한칼에 베어 버리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우리 삶의 근본에 자리하고 계신 우리의 참생명입니다.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말은 그럴듯한 구호가 아닙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를 얽매어 왔던 굴레들을 끊어 버리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어설픈 연민(憐憫)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자기를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소위 기적(奇蹟)이라는 현상은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기적이란 여태까지 인정했던 삶의 굴레 안에서 받아드릴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할 때를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자기의 본질과 자기가 하는 일에 관한 새로운 자각이 있는 사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고, 원래부터 구제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쉬운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단순히 정신생활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전존재(全存在)를 던져 일생을 걸어야 합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범위의 틀 속에서는 불안과 두려움만 생깁니다. 이 틀은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속할 뿐입니다. 믿는 대로 받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관음경에서, ‘생각 생각 의심치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거울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손거울이든 전신거울이든 크기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안방에서만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까지 거울을 마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울 자체를 바라보고자 함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자 할뿐이지요.
우리가 믿음을 입에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대상으로 여긴다면, 믿음의 내용은 실제의 삶과는 전혀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행복과 불행이라는 잣대로 규정해 놓고 아무리 열심히 믿어 보아야, 그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든 자기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마음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입니다. 즉 인정한 만큼의 자기 생명내용이 믿음이기에, 믿어서 펼쳐지는 결과로서의 세계 보다는 근원적인 데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특수한 물음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되는 물음으로서 삶의 근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요.
따라서 삶의 중심인 부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바라보는 상대의 입장에 서 계신 분이 아닙니다. 과거 3000년 전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의 문제가 있는 한,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간이 만족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로 3000년 후에도 문제가 있는 한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런 끝없는 문제들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모순들을 완전히 해결하는 근본에 자리하십니다. 아니 보다 정학하게 말한다면, 근본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당마다 모시고 있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봅시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화려합니다. 넉넉합니다.
뭐라고 한 두 마디 말로 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온갖 삶의 실현으로 와 닿습니다. 어떨 때는 인자하신 어머니와 같이, 또 어떤 경우에는 다정한 연인과 같은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부족함이라든가, 불평과 같은 속기(俗氣)를 말끔히 씻어 낸 모습입니다.
그럼 관세음보살은 왜 이런 모습으로 자리할까요?
무한한 우리의 생명이 완전하게 성취된 상태를 나타내다 보니,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救濟)를 따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구제된 것이 바로 우리네 삶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偶像)도 아니고 특별한 엘리트들의 독점도 아닌 평등한 생명임을 시사하면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생명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누구나의 마음에 있는 자비와 지혜의 힘을 드러냅니다. 완전하기에 아름답고, 성취가 항상하기에 의젓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참생명을 찾는 모든 구도자(求道者)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관세음보살의 나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의 괴로움을 제3자의 입장에 서서 관찰하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괴로움에 녹아들어, 그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괴로워하는 그 사람과 자기를 함께 구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修行)하신 내용을 가리킵니다.
또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있지 않기에 자재(自在)한 관찰을 하게 됩니다.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부르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자신답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주체와 객관의 현상이 따로 있지 않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진실이기를 바라는 사건이나 사물만을 말하는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우리의 일생만을 본다면 수십 년의 세월을, 그리고 인류가 살아온 날들을 감안한다면 수백만 년을 말입니다.
이렇게 단 하루도 자신을 마주하지 않기에, 보통사람들의 나날은 온갖 공포(恐怖)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혹은 자신을 일러 죄인(罪人)이라고 하고, 혹은 팔자(八字)가 나쁜 사람이라는 투로 너무나 쉽게 우리의 참생명을 모독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살아 주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무서운 신(神)이 있다고 그것이 내 인생 자체를 어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렇게 삐뚤어진 삶에 대한 여지없는 단절(斷絶)에 있습니다.
아닌 것을 가지고 맞다고 하고,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무책임한 세상풍조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뒤집혀진 망상을 한칼에 베어 버리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우리 삶의 근본에 자리하고 계신 우리의 참생명입니다.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말은 그럴듯한 구호가 아닙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를 얽매어 왔던 굴레들을 끊어 버리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어설픈 연민(憐憫)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자기를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소위 기적(奇蹟)이라는 현상은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기적이란 여태까지 인정했던 삶의 굴레 안에서 받아드릴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할 때를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자기의 본질과 자기가 하는 일에 관한 새로운 자각이 있는 사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고, 원래부터 구제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쉬운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단순히 정신생활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전존재(全存在)를 던져 일생을 걸어야 합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범위의 틀 속에서는 불안과 두려움만 생깁니다. 이 틀은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속할 뿐입니다. 믿는 대로 받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관음경에서, ‘생각 생각 의심치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1개의 댓글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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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녀
2010.05.18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