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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발견하는 것

문사수 2010.04.01 조회 수 24336 추천 수 0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것


길가에 핀 들꽃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발견의 기쁨으로 흠뻑 젖은 눈망울은 참으로 맑게 빛납니다. 어느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따뜻하고도 넉넉한 분위기를 아낌없이 뿜어냅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날마다 각박한 세상에 찌들어가는 마음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바람은 더욱 강렬해지기만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동화속의 이야기로나 치부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혹시 그런 사람을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본다거나 옆에 서 보기라도 한다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주위의 눈길일랑 아랑곳 하지 않고 갈 길도 잊은 양 몰두한 모습. 이 사람의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은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마음에 드는 상품을 사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갖게 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사람, 다시 말해서 발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깃드는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 못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눈을 뜨고 있으면 반드시 앞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상념에 빠져 걷다가 전봇대와 부딪히는 낭패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얘기는 무엇을 말하는가요?
 분명히 두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소경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주의를 기울여 지팡이에 의지하고 사는 소경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도 앞에 놓인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눈이 먼 것이고, 육체적인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삶의 영역을 끝없이 발견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눈을 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삶이란 불변(不變)의 사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나라는 대립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에게, 참된 의미의 삶은 없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깥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기에 앞서서 자신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물론 “나 혼자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게 변하겠는가?” 하는 식으로 반론을 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나름의 지식과 경험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의지할 바의 확실한 근거라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다음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일본의 경우지만 의무교육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반도체 메모리에 넣는 데는 단돈 500엔이면 된다.” 얼마 전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 중에 한 말입니다.
 정보화(情報化)의 첨단을 걷고 있다는 일본이 그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무튼 일반국민들이 의무교육 기간을 통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다방면으로 두루 얻는다고 볼 때, 지식의 유한성을 시사하는 지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체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전혀 알고 있지 못하던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자신을 돌아보면 이미 체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을 먹던 사람이 오랫동안 술을 먹지 않으면 술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반면에 술을 전혀 입에도 대지 않던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술에 대한 그리움을 갖지 않습니다. 이는 곧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생명현상에 원래 내재(內在)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말로야 바깥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이미 자리하고 있던 아름다움을 다시 음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출발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바탕에서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기대한다는 것부터 모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짜 맞추기 식의 삶은 실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지요.

백유경의 비유를 봅시다.
 부인이 너무 예뻐서 몸살이 날 지경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부인에게 전혀 불만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 데 아무리 보아도 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부인의 코를 더 예쁘게 할까가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마침내 나름의 해결책을 구상한 그 사람은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터로 나갑니다. 오가는 여자들을 유심히 쳐다보지만, 다른 데는 흥미도 없고 다만 코의 모양새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의 코를 보니 엄청나게 예쁜 게 아니겠습니까? 앞 뒤 가릴 것 없이 미리 준비한 칼로 재빨리 그 여자의 코를 도려내서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이 코만 달면 부인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리라는 꿈을 안고서 숨가쁘게 집에 당도한 이 사람. 인사하는 부인을 붙잡고 다짜고짜 코를 도려냅니다. 그런 다음 훔쳐 온 코를 부인의 얼굴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바람직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남의 코가 부인의 코에 그대로 붙을 턱이 없었기에 말입니다. 제멋대로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하다가 멀쩡한 두 여자를 코 없는 흉한 몰골로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자기를 둘로 나누다 보니까, 뒤죽박죽의 삶이 둘 사이의 적당한 뒤섞임 정도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면 곤란하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설사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이 밖에서 다가온다고 해도 그 가치를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삶이 뒤틀릴 테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눈 뜬 사람,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계기로 아름다운 삶을 일군 두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로 유명한 중국의 사마천을 봅시다.
 이 사람은 당시 역적으로 몰린 이능이란 장군을 두둔하다가, 궁형(宮刑 :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는 가혹한 운명에 처합니다. 하지만 남성의 상실이라는 좌절감과 군주에 대한 원망도 잠깐. 그는 붓을 들어 천추에 길이 남을 명문장인 ‘사기’를 남겨서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겸손함을 일깨웠습니다. 
 또 한 사람. 그는 혁명의 와중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눈이 멀고 맙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원망하던 그는 어느 날 딸을 불러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합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자신의 작품에 살려 놓는 힘겨운 작업이었습니다. ‘실락원(失樂園)’을 쓴 밀튼이 바로 그 주인공이지요.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아름다움을 발견하고는 그 아름다운 삶을 자신의 것으로 가꾼 사람들은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 자체에는 아름답고 추함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환경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조화(調和)된 정도에 따른 결과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세상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세상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기에, 세상이 변하기를 요구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이 먼저 변하면 그만입니다.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세상의 아름다움이 조화되지 않은 데 말미암습니다.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을 느끼거나 인간적인 모멸감을 갖는다면, 자신에게 잠재하고 있었던 그런 감정을 확인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움과 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생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인정되기에 앞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먼저 긍정할 때,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불러오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말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와 같이 우리가 따로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주어진 삶의 가능성이며 증명되어야 할 사실인 것입니다.
 이는 곧 삶의 참모습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육체적인 한계로 파악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시간을 줍시다.
현실을 어둡고 음습하게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본래부터 열려 있는 아름다운 삶의 지평을 확인하도록 배려합시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는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베푸는 주인공이 되도록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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