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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만남을 위하여

문사수 2009.12.24 조회 수 30793 추천 수 0
인연의 도리


 항상 하길 바라지만 어느 날 인연이 다했다 싶으면, 그 사람이나 사건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질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무상(無常)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현상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생의 철칙입니다.
 이것이 무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지만 무상한 가운데 항상(恒常)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태어날 때부터 몸뚱이 받고 또 죽는 날까지 세상으로부터 받는 생명력입니다. 살면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세상이 나에게 베푼 보시(布施)의 결과입니다. 밥 한 그릇 내가 내 돈 주고 사먹는다고 할 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대자연의 생명력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살려주는 은혜 속에서 나는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생은 결코 허무한 게 아닙니다. 끝없는 만남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기에 말입니다.

엄청나게 오래 산 눈 먼 거북이 태평양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100년 만에 한 번 숨을 쉬기 위해서 수면위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정처 없이 떠다니던 구멍 난 판자가 그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입니다. 마침 올라온 거북의 목과 그 판자의 구멍이 만나서 거북의 목이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갑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넓디넓은 바다에서 나무판자의 구멍에 거북의 목이 정확하게 들어갈 확률은 아마도 몇 천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로 상상키 어려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고 하는 바, 우리네 세상살이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시사합니다.

사실 우리의 만남이라는 게 하찮은 것 같고 일상화된 것 같지만, 하나하나 따져보게 되면 어떻게 그때 그런 모습으로 만났는지 기적 같기만 합니다. 그렇기에 인생에 우연이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만나야 될 인연이 있기에 만나는 것이고, 그 만남 속에서 삶을 가꿔갈 뿐입니다. 그러다가 또 때가 되면 그 인연이 다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만남이란 그때마다 새로이 만나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합니다. 때문에 과거의 만남이 지금과 동일하리라는 것은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닙니다. 만남이란 항상 새로운 생명과 함께 하기에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제의 그 사람이 오늘의 그 사람이요, 오늘의 그 사람이 내일의 그 사람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얘기를 나눈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법우는 졸업식장에서 많은 친구들과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얼마 후에 꼭 만나자.”
 이렇게 말입니다. 당신은 그 후로 당시의 친구들을 얼마나 만났습니까? 모르긴 하지만 단 한 번도 못 만난 친구가 대다수일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후로 우리가 또 만날 것이라는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로, 부인으로 또는 자식으로서의 모습에만 자신을 국한시키고 그 설정된 범주 속에서의 삶만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물결에 휩쓸려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보냅니다.

그러니 내 옆에 나타나는 인연(因緣)이 소중할 리가 없습니다.
 그냥 흘려보낼 뿐입니다.
 그러다가는 이렇게 스쳐 지나가고 난 뒤, 새삼 그 모습을 그리워하며 중얼거리곤 합니다.
 “그때 인연을 좀 더 소중히 할 걸...”
 만약 보다 적나라한 상태를 알고 싶다면, 한 달 전 신문을 구해서 헤드라인을 채우고 있는 뉴스와 오늘 맞이하고 있는 현실을 비교해 보십시오. 당시로서는 충격적으로 취급되었던 사건의 결말이 어땠는지를 상기해 보십시오.
 아마 그때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몹시 불안했거나 무척이나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그렇게 내 인생에 충격파를 줄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란 사실에 혹시 당황할지 모르겠습니다. 가공된 정보가 오히려 나를 구속하고는, 실재하지도 않는 상황을 실재라고 나를 믿게 만들었던 데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체 미련의 끝은 어디인지, 언제까지나 요행수를 바라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좀 되었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면서 말입니다.

때문에 눈을 뜨고 있어도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지 못하고, 귀를 열고 있어도 옆 사람의 얘기를 듣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를 어여삐 여기신 부처님은, 무명(無明)이라는 말씀으로 일깨워주십니다.
 철학자 니체가 권력(權力)에의 의지라고 해서 무명을 아주 철학적 단어로 풀어냈듯이, 우리들은 스스로 설정한 돈이나 명예나 자존심 등과 같은 권력에 복종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명이 뜻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 밝지 않은 상태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끝없이 쫓기면서...

이렇게 바깥으로만 치닫는 그 마음은 자신이 딛고 있는 발밑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만남에는 눈을 감고, 특별한 만남을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 자체가 이미 망상(妄想)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발밑을 보아야 합니다.
 이미 그 자리야말로 내가 살고 있는 참다운 의미요, 궁극적 의미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린 다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아는 만큼 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책 몇 줄 읽었다고, 어디 가서 강연 몇 마디 좀 들었다고, 구경 좀 했다고 그것을 근거로 세상을 판정하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는 지식(知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식은 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똘똘 뭉친 과거의 산물입니다. 때문에 지식 자체만으로는 인생을 결판낼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생명현상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린 지금 누굴 비난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반성의 결과는 지목행족(智目行足)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과 행동하는 다리를 가져야 한다는 절박성 말입니다.
 운전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밤중에 길을 가는데 전조등이 켜지지 않는다면 꼼짝을 못합니다. 아무리 차의 성능이 좋아도 라이트를 켜지 않고 운행한다는 것은 만용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깜깜한 인생길을 밝힐 수 있는 라이트가 바로 지혜입니다.
 또한 다리가 있어도 쓰지 않는 사람은 앉은뱅이와 다름없습니다.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파악하고는 다시 세상을 구속합니다. 그러다가 그 세상이 자신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않으면 세상을 비난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반대로 그 안에 들어오면 내 편이라고 좋아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눈을 밝히고 행동하는 다리로 살아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이 벌어집니다. 이때야말로 인연의 소중함을 자기화 하는 만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너무 주변의 눈치를 보지 마십시오.
 남들은 어떻게 살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로부터입니다.
 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는 이 순간부터의 만남을 소중히 하십시오. 언제 다시 만날 지에 대한 보장은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목적지(目的地)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만남의 출발선(出發線)상에 서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는 그 길은 그때마다 완전한 길이며 완전한 만남이지, 어디 따로 특별함이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을 확신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기가 만나는 인연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이 같이 휘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한 사람이 조화(調和)로울 때 당연히 바로 옆의 사람도 조화의 물결을 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연의 법칙(法則)에 따라서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moticon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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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2010.01.22
處處佛像 事事佛供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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