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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사랑한다면...

문사수 2009.12.16 조회 수 28875 추천 수 0

   

자기를 바로보라

 


예전에 홍콩에서는 묘한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에 따라 상점마다 현수막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이중 한 쇼핑센터에서는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각국의 말로 축하메시지를 줄줄이 걸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한국말로 쓰인 문구가 말썽이 되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축하메시지 내용이  “바보 또라이”라고 쓰였던 것이지요.
이에 화가 난 현지 한국교민들이 거센 항의를 해서 마침내 공식적인 사과와 시정을 약속 받았다고 합니다.

설마하니 홍콩사람들이 그 말을 쓸 때,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를 알고 썼을 리는 없을 겁니다.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려고 내놓은 문구에 고객에 대한 욕을 담은 내용을 담는 상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그 문구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는 한국사람들만 기분이 상했을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아낍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 합니다.
때문인지 누군가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 없는 반격을 시도합니다.
그 대상은 얼굴 생김새로부터 성격상의 결함에 이르기 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요.

반대로 얼토당토않은 찬사를 받는 경우에도 괜히 입을 벙긋벙긋 하며 좋아합니다.
번연히 자신을 향한 아첨인 줄 알면서도 흐뭇한 기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렇게 자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그럼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아야 하다는 이 자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자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을 든다면 신체적인 조건일 겁니다.

키가 크다거나 힘이 센 것은 물론, 눈매가 아름답다거나 손이 예쁘다는 등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만져지는 감각적인 것도 빼놓을 수가 없구요.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 비교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대상이 됩니다.
 
다음에는 아마 정신적인 상태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이는 세계정세에 대한 견해로부터 사소한 감정의 흐름에 이르기 까지 너무나 미묘합니다.
자신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난해합니다. 또한 배운 지식이나 경험들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기에 의심의 여지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객관적인 설명으로만 일관한다면, 대개 이런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범주를 뛰어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객관화된 자기의 내밀한 부분까지 파헤쳐 본다면, 얘기는 자못 복잡합니다. 
 나름대로 삶을 구축하고 있는 만큼 펼침의 영역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삶의 표출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에게 속한다고 인정되는 것들에 대한 의도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회사든 아니면 자신이든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또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리지도 않습니다. 모두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요.

세상에 속한 자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소속된 세상을 삽니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나 자기는 대접 받아야 합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은 만큼, 나이가 많으면 많은 만큼 혹은 돈의 액수에 걸맞도록 자기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기 이런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을 소개합니다. 그 결말과 함께···


부처님 당시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노인은 살림이 넉넉하였던지 일생을 집짓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습니다.
사방에다 집짓는 데 이골이 나서 몸소 작업 현장을 돌며 온갖 일을 독려하고 있었지요.
하도 바쁘다 보니 자신의 나이도 잊을 만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평상시 이 사람의 정황을 딱하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불시에 방문을 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무 고생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집을 지으면 누가 살 겁니까?”

 자랑스러운 말투로 그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거실에서는 손님을 대접하고, 후원에는 내가 거처하고, 동서(東西)의 두 곁채에는 아이들과 종들이 살게 할 겁니다. 또 계절에 따라서 시원한 곳과 따뜻한 곳을 번갈아 머물 겁니다.”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들으니 노인은 생각이 말보다 느리다고 하던데, 내가 살고 죽는 데에 유익한 게송을 일러주고 싶소. 잠깐 일을 쉬고 같이 앉아 들으면서 얘기나 나눕시다.”

 정신없이 바빠서 차분히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노인을 앞에 두고 부처님은 할 수 없이 게송만을 일러주셨습니다.

 “자식이 있고 재물이 있으나 /  어리석어서 허덕일 뿐이구나. /  ‘나’도 또한 ‘나’가 아닌데 /  자식과 재물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어리석음의 끝은 황당하기 까지 합니다.

 “그 게송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하더니,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터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신이 직접 서까래를 집어 올리다가, 서까래가 떨어져 머리가 깨지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앞에 등장한 노인만이 아닙니다.

당장 닥쳐 올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서 하루하루를 사는 게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도 모릅니다. 다만 자기라는, 아니 자기에게 속했다고 인정된 세계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자기를 무조건 사랑하다가 명줄이 다하면 죽을 뿐이라고 강변할 따름입니다. 내심 특별한 대안이 따로 없으니 그럴 법도 할 겁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생긴 이유를 알 법도 합니다.

누에가 제가 지은 고치 속에 갇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생, 이것이 흔히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자기의 정체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 자기만을 주장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만물들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틀 속에 갇힌 사람만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요.
세상에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명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항상 새로운 생명이기에 남들의 대접을 누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다른 생명을 구속하고 있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로 모아진 유일한 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다시는 보상받을 수도, 대접받을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오로지 완전하고도 꽉 채워진 생명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 따름이지요.



반면에 굳어진 자기란 불완전한 자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더 이상의 생명현상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주장하면 할수록, 오히려 자기 생명에 대한 불신(不信)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변화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목이 타서 물가에 다가 간 말이 멀거니 물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격이지요.

진정한 자기는 결코 멈춤이 없습니다. 끝없는 삶의 주인이 됩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닙니다.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 죽음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 현상은 언제나 위대합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한 사람의 몸으로 살아가는 게 엄연한 세상살이지만, 그것은 물질의 수준에서나 거론 할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생명이 아닌 살려주고, 사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부처님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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