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릅니다. 그것도 거침없이 타오릅니다.
시도 때도 없고 장소의 가림마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마침내 끝없이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인해서 잔뜩 메말라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타오르고, 누가 메마르다는 말인가? 나름대로 만족의 범주를 설정하고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의 치열함은 하늘을 태울 듯이 타오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쫓기는 도망자인 듯 살아가면서도, 당최 여유가 없어서 삭막한 것이 마치 메마른 고목(枯木)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인정하는 이상으로 바깥에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는 곧 제아무리 그럴듯한 조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깥의 행복부터 찾으려는 욕망의 치열함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의 조건(條件)일지라도 그것의 좋고 나쁨에 구애되지 않는 자기 마음의 태도부터 점검하고 볼 일입니다.
가뭄이 극심할 때는, 비가 쏟아지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하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지면서 해갈(解渴)의 수준을 넘어 홍수라도 나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로 “하늘도 무심하지!”하며 원망 섞인 푸념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래요. 자기의 구(求)하는 바 기준치가 있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만큼 조건이 쏟아지면 난 만족할거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이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우기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불행하다는 식의 시소게임을 수시로 벌입니다.
이러한 삶을 언제까지나 그래도 봐줄만 하다고 방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성장과정에서 대개의 경우, “너는 집안을 일으켜야 된다. 그러므로 출세해라. 공부 잘해라”하는 어른들의 소망을 귀 아프게 듣습니다. 허나 이런 소망을 빙자한 끈질긴 요구(要求)의 밑변에 어떤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 솔직히 마주한다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자신보다 배우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살라고 하는 공부를 우리는 해왔던 것입니다. 이게 단순히 사회구조적인 얘기로 그치질 않습니다. 왜 공부를 잘해야 하고, 왜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배웠습니까? 공부를 잘 하면 편한 자리에 앉고, 돈이 많으면 사람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배웠고, 이런 사고방식을 자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게 사실 아닙니까? 이게 자본주의의 쓰레기적인 행태이고, 이것을 역이용한 게 공산주의의 막 되먹은 계급투쟁 아닙니까?
우리의 욕망체계를 점검하지 않고는, “내가 왜 사는지? 사는 사람은 누군지?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묻지 않고서는, 실로 남을 비판할 자격도 세상을 원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은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다 북망산(北邙山)이 어느 날 앞에 떡하니 나타나서는 갈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눈 감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해답을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문제를 호도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이제 그만!
눈[眼]은 세상 만물을 다 볼 수 있지만, 단 하나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모순(矛盾)을 갖고 있는데도, 눈으로 세상을 다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내가 봤다”고 하지만, 그 근거인 눈이 갖는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신은 그것을 무척이나 신뢰할지라도, 내용적으로 온갖 편견의 연속과 굴절된 사고방식의 표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눈을 볼 방법이 전혀 없는 게 아닙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때 눈은 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거울이라는 현상의 자기 모습을 봤을 때, 진정한 자기를 볼 수 있음을 뜻합니다. 내 앞에 있는 거울로서의 세상, 그 세상에 비치는 나와 분별 또는 대립해 있는 나는 본래부터 없기에 그렇습니다.
먼저 자기부터 봅시다. 세상은 나로부터 보이는 세상이지 그 세상에서 내가 거꾸로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먼저 자기를 보고, 그러고 나서 현상계를 살아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오직 나의 반영(反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와 비슷한 정도가 아닙니다. 온통 나와 다르지 않은 세상이 벌어집니다.
마침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간관계의 갖가지 인연(因緣)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뿐입니다. 상대적인 처지를 바탕으로 해서, 싫은 것은 외면하고 좋은 것은 쟁취(爭取)하려는 가치판단을 일으킬 새마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있는 그대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내 눈앞에 보인다면, 그것은 좋고 싫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모두가 나의 삶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의 삶으로 복귀하고 있을 따름이니, 바로 이럴 때가 “나무(南無)!”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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