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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문사수 2009.09.15 조회 수 39290 추천 수 0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늘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스물다섯 글자를 중심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물다섯 글자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까지인데, 이 25글자 속에 불교가 다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같은 의미로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는 보살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구원된 상태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참생명의 상태는 이미 구원이 마쳐진 세계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이고, 즐거움만이 가득한 세계, 절대무한인 세계입니다. 이러한 절대무한이 우리들의 진실생명이기 때문에, 구원을 구한다는 것은 참생명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자재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재(自在)란 ‘스스로 있다’는 말로 절대존재와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절대존재를 본다[觀]는 것은 지금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진실존재를 보는 것으로, 진실존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관자재란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이’란 뜻이고 보살은 ‘구도자’란 뜻이므로 관자재보살이란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자라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이마에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이고 계세요. 이마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은 관세음보살이 끊임없이 이마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고, 또한 그분의 활동, 그분의 생명력 모두는 자신이 이고 있는 그 부처님을 근원으로 해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관세음보살님 또한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자라는 것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행해서, 행하면’이란 말입니다. 반야는 지혜의 광명, 무한촉광의 광명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으므로 괴로울 이유가 없지만,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원인은 무명(無明), 어두움 때문입니다. 살면서 혹 몸에 병이 나더라도 병 고치는 방법은 반야바라밀의 광명을 비추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민이 많다, 갈등이 있다, 괴로움이 있다, 슬퍼 죽겠다는 등 모든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무한촉광의 광명을 들이대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 방이 원래는 어두운데 전등을 켰기 때문에 밝아요.

전등을 밝힌다는 말은 발전소하고 전등이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연결되면 전등의 능력이 발전소의 능력하고 같아집니다. 즉, 발전소의 능력하고 전등의 능력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단절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발전소와 연결되면 즉시 전등의 능력과 발전소의 능력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발전소에서는 전기가 한량없이 나오는데 전등이 그러한 한량없는 전기를 능력껏 받아서 이 방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란 말은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자가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그 진실생명을 생존의 근거로 삼았을 때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무한촉광을 들이대고 보는 것, 이것이 조견(照見)입니다. 들이대서 비출 수가 있는 것이죠. 비추어서 보면 참으로 존재하는 진실된 존재는 드러나고, 비실재[있지도 않으면서 있는 척했던 것, 허망한 것]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런데 <조견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을 말하는데, 색은 물질을 말하고, 수상행식은 감각, 지각, 의지, 의식으로 정신활동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신과 정신활동을 통 털은 우리들의 개별생명을 말합니다.
나[我]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온입니다. 우리들은 몸뚱이를 비롯해서 정신작용이 정말로 있는 줄로 알았는데, 우리들의 눈으로 보였을 뿐이지 무한촉광의 광명으로 비추어 보니까 그런 존재는 본래 없더라는 것입니다.

있다고 볼 때에는 있는 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 때문에, 개별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발전해서 육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육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집착이 생기고, 집착의 도수만큼 몸뚱이에는 고장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또한 개별생명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정신작용에 대해서도 고집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믿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한광명을 비추니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견오온개공이란 개별생명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나오는 일체의 모든 괴로움[마음과 몸의 괴로움:고액(苦厄)]이 건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다 건넌다, 벗어난다]>입니다.

일체의 괴로움이란 생사(生死)를 의미합니다. 일체고액을 건넌다는 말은 ‘괴로움 없는 세계에 살겠다, 즐거움만이 있는 세계에 살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생명인 진실생명을 생존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개체생명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을 생활의 근거로 하기 위해서는 개별생명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해야 합니다. 나라는 육체생명, 나라는 정신생명, 나라는 존재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떼버리는 것이죠.


개별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나무’라고 합니다.
‘나무’에 의해서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위치가 켜짐에 의해서 발전소의 능력이 드러나듯이, ‘나무’에 의해서 아미타인 부처님생명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에요. 진실생명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는 말은 <나무아미타불했을 때>라는 말입니다.


진실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자가 아미타불했을 때 개체생명은 본래 없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부처님생명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개체생명에 있었던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괴로움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건 전부다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그 문제 때문에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장벽에 부딪히더라도 그 장벽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역경에 처했더라도 그 역경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 글자에 의해서 진실생명을 드러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듣는 것[聞]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생각[思]하고 닦을[修] 일이 남았습니다.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거래처하고 이야기하던 것, 어떤 사람이 욕하던 것, 다른 사람한테 손해를 보던 생각들이 납니다.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생각이 되질 않죠. 생각을 제대로 하려면 닦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제로서 반야심경을 10독 하라는 숙제를 우선줍니다. 아침, 저녁으로 10독씩 하는 겁니다. 반야심경을 읽는 가운데 나의 진실생명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하고서 그 다음에 나오는 사리자(舍利子)는 우리들 자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처님이 이런 법문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진실생명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열 번을 읽으면 열 번 읽은 것만큼 나의 현상세계, 중생세계에 대한 집착심이 그만큼 엷어지고 내가 백번을 읽으면 백번 읽은 만큼 진실세계에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반야심경을 열 번 읽고 그 다음에 나무아미타불을 최소한 이천 번만 하세요.

오늘부터 해봐요. ‘왜 나한테만 이렇게 괴로움이 많습니까? 어째 세상 사람들이 나만 이렇게 못살게 굽니까?’ 라는 원망하지 말고 염불하고 반야심경을 외우면 됩니다.


염불에 목적이 있다면 하나의 수단밖에 안되니까, 목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이 나의 참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에 의해서 나무아미타불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moticon

1개의 댓글

Profile
생긋^^
2010.10.25
관자재란 스스로 본다는 뜻으로 부처의 시야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관자재 하는 것인데, 이 사실을 반야심경에서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엉뚱하게 해석하면 중생을 다시 미혹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점검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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