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을 이르는 여러 이름 중에 대표적인 것이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은 온갖 싸움에서 한 번도 지지 않는 용사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이라는 싸움터에서 자기와의 싸움, 남과의 싸움, 과거와의 싸움, 미래와의 싸움, 공간적인 싸움 등 온갖 싸움을 합니다. 그 속에서 한 번도 지지 않는 용사(勇士)가 있는 집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싸우고 있는 게 인생일까? 싸울 너가 없기에 지지 않고 이기는 겁니다. 싸워서 확보되는 생명은 참생명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 용사(勇士)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내가 있다’는 뿌리 깊은 착각!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 그동안의 경력, 익숙한 모든 것들이 다 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있다는 전제에서는 없어질 것을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사업을 하든, 시험을 보든, 운전을 하든 간에 나를 앞세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공포심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때에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 바로 용사입니다. 나로부터 생명가치를 드러내는 참다운 삶의 주인공말입니다.
부처님법을 로마까지 전 세계에 전파했던 아쇼카대왕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친형제 한 명만 빼고, 아버지 피를 받은 이복형제 120명을 다 죽일 정도로 잔인했던 인물입니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도 밝음이 드러났기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어릴 때 비오는 날 지렁이를 죽이려고 소금을 뿌리고 웃었는데, 꿈에 지렁이가 나타나서 나를 칭칭 감아서 엄청나게 놀란 적이 있어요. 지렁이를 괴롭힌 업보를 받은 거죠. 하물며 자기 형제를 100명이상 죽였으니, 아마도 일생동안 공포에 떨었을 겁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명의 위대함을 빛냈던 분이 바로 아쇼카대왕입니다. 그가 부처님께 온전히 귀의를 하게 된 것은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남에게 허황된 짓을 했구나.’ ‘어둠이 나에게 등장했구나.’하는 것을 전면수용하는 가운데서 생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거죠.
어떤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과보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눈만 껌벅했는데 어떤 이는 윙크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비웃었다고 하듯이, 행위를 받아들이는 과보 또한 다 다릅니다. 어떤 것도 실체가 없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행위와 행위에 따르는 과보가 둘이 아닙니다. 살아감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벌어진 것인데, 그 안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나 외면하고 사는 거나 끝내는 인과법에 의해서 수레바퀴처럼 돌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주하고 보니 그것은 실체가 아님이 드러납니다. 어떤 행위도 실체가 아니고 실체의 결과마저도 실체가 아닙니다.
답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흔히들 고민하는 것을 행복하지 않다고 하죠. 요즘 누구든 묻기만 하면 바로 대답해준다는 사람들이 인기인데, 마치 만물박사처럼 모든 답을 다 줍니다. 옛날 어떤 용한 점쟁이보다 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답을 좋아할까요? 인과 속에서 계속 좋은 인과를 갖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내가 내린 결론에 걸맞는 답을 구하는 거 아닐까요?
‘나’라는 인과 속에서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일이 착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게으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나는 착한 일을 한다고 했지만 가증스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예요. 이렇듯 상대적입니다. 인과는 결국 상대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상대세계 속에선 결코 궁극적이지 못합니다.
행복은 오직 누리는 거라고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결과를 확인하는 게 행복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자리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을 전면 수용하는 가운데서, 지금 내가 숨 쉬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외에 나머지는 행복의 조건일 뿐입니다. 조건 가지고 싸우면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거기서 살아날 방법은 없습니다. 설령 숨 쉴 수 없는 위기상황이 온다 해도 그것은 나에게 닥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객관적인 실체는 아닙니다. 시련 또한 그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과보가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이고, 죄인이라 불리는 어떤 사람도 내 입장에서나 죄인일 뿐, 실은 업장 소멸의 기회를 그 사람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과를 전면수용하라
우리에게는 분명히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난이 가득한 이 세상을 떠나겠다, 외면하겠다는 건 바람직한 삶의 자세가 아니죠. 고난의 현장인 이 땅에서, 궁극적인 삶의 가치가 돋아나고 있음을 우리는 미룰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디 가서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따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인과 속에 살면서 좋은 인과 나쁜 인과를 따지며 내 것을 따로 챙기는 사람은, 이미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에 그 사람을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의 가치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 사람에게만 돋아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나간 인과에 지금의 마음도 휘둘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를 앞세워 살았던 그 인과의 삶에 대해 전면수용하면 그만입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참회(懺悔)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찌꺼기가 남아있다면 또 참회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오직 감사밖에 더 있을까요?
모든 공포의 밑변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 때문에 온갖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제 알았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은 인과의 반복이 아니라 은혜를 갚겠다는 거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과 일을 통해서 나를 만나는 분들이 밝음을 깨우치고 그 밝음을 또다시 전파할 수 있도록 은혜를 갚는 거죠.
부처님을 뜻하는 여래십호 가운데 응공(應供)이 있습니다. 마땅히 공양 받을 만 한 분에게 공양을 올리니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죠. 부처님 되려고 따로 애쓸 거 없습니다. 공양 올리면 됩니다. 정진의 공양을 올리세요. 기쁨의 공양을 올리세요. 감사의 공양을 올리세요. 그러면 이미 그 주인공으로 사는 겁니다. 기쁨을 쟁취할 것도, 감사를 드릴 것도 없어요. 감사를 누리는 당사자요, 기쁨을 항상 만끽하는 주인공으로 살게 됩니다.
나를 앞세우고 있으면 인과가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정복하는 공양을 통해서 인과에 매이지 않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과에 매이지 않음으로 인해 인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과에 걸림 없는, 참으로 떳떳하고 용기 있게 살아갈 법우들을 미리 찬탄하고, 공양을 맘껏 누리기를 거듭 축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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