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값
부처님께는 수많은 전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비왕(王)이었던 시절의 일입니다.
오직 수행 정진에 매진하는 것만이 왕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칭송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로도 전해져서 마침내 부처님의 법을 옹위하는 제석(帝釋)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료 비수갈마와 더불어 시비왕의 진심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적당히 마음을 떠보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시험이었던 것이지요.
매로 변한 제석과 비둘기가 된 비수갈마가 드디어 연극을 시작합니다.
매에 쫓기던 비둘기가 대중들과 함께 있는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구원을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본 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비둘기야, 놀래거나 겁내지 말거라. 나의 몸이 살아있는 한 끝끝내 너를 죽이지 않고 반드시 너의 목숨을 구호해 주리라.”
물론 진정어린 그러면서도 단호한 대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이라는 보증은 아직 없습니다. 뒤따라 온 매가 던지는 물음은 왕을 생각지도 않던 딜레머에 빠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나의 밥이다.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굶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왕은 곧 자비심을 버리는 게 되지 않겠는가?”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아마 시비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 정도 대응이나 하겠지요.
“꼭 비둘기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고기는 안 되겠는가?”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가 다시 대답합니다.
“상관이 없지만 싱싱한 고기와 피가 아니면, 나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기왕의 죽은 고기라면 어떻게 구해 보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싱싱한 고기와 피가 있으려면 멀쩡한 생명을 죽여야 합니다. 한 생명을 살리자고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면, 이런 모순도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갖가지의 방법을 떠올려 보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마는 그렇다고 내 몸뚱이를 내 줄 수는 없지 않은가요?
아마 여기까지가 우리들이 보통 이야기하는 자비의 한계 같습니다.
그런데 시비왕은 이 한계를 가까스로 돌파합니다.
“매여, 네가 내 몸의 살코기라도 먹으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얼마나 어렵사리 꺼낸 제의인데, 매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다 조건 달기를 잊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몸의 살코기를 저울에 달아서, 비둘기의 무게와 같아야만 내가 받아 먹을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매가 던진 이 한 마디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조금이라도 떼어낸다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상상키 어려운 일이기에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머리카락을 한 올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벌컥 성을 내는 판국에, 이런 큰마음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한껏 기뻐하며 흥에 겨워 춤이라도 출 것만 같습니다.
감흥을 못이긴 왕이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매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때이로구나.”
그러나 대개의 경우 말로만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듯한 약속을 하여서 명분을 획득하고 세상의 찬탄을 받고 나서는 실제로는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한 인생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을 순진하게 믿고는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면서 도움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스러져간 가엾은 사람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표를 노린 공약(空約)이 되는 게 다반사고, 사회사업가를 가장한 인면수심(人面獸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생존을 향한 의지마저 꺾어 놓아 더 이상 일어설 수도 없게 만든다면, 이것이 바로 살생(殺生)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비왕은 수행자입니다. 생명 살리기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 수행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결행합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다리의 살을 거침없이 베어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몸뚱이 살을 보며 어찌 아쉬움이 없었겠는가마는, 자신의 다리 살로써 비둘기라고 하는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거룩한 생각은 그런 망설임을 일거에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분명히 어림짐작에도 비둘기보다 훨씬 많은 양의 살점을 떼어서 올렸건만,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하지만 기왕에 든 칼입니다. 팔을 떼어내고, 등을 베어내어서 저울에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을 텐데 하는 나름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숱한 분노는 이러한 기대의 상실로부터 말미암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픈 사람을 간호하던 식구의 태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과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내 할 도리는 다한 것 같다.”
헌신적으로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뜻과는 엇나가는 아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이만하면 어미의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렇습니다.
‘이만하면...’이라는 자기 삶에 대한 측정이 따라 붙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사람도 견뎌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런 의욕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과 같기에 무엇을 새롭게 시도한다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상대를 향해서 분노의 화살을 당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한 요구를 해 오게 되면, 삿대질이라도 해서 분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한단 말이냐. 너를 위해서 그럼 내가 죽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식의 고함을 지르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쪽의 뻔뻔스런 태도가 클로스업 되는 순간부터, 이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불을 질러버리고 맙니다.
아마 시비왕의 이만한 정성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것도 비둘기라는 새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만큼 하였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마저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렇지만 왕은 약속하였습니다. 반드시 비둘기의 목숨을 구해줌과 동시에 매 또한 굶어 죽지 않게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래의 약속 자리를 떠올려 볼 때, 시비왕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비둘기의 생명이나 매의 생명은 사람의 기준에서 본 하찮은 생명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완전한 생명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셀 수 없을 만치 다양한 만남마다의 성격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해를 끼칠 사람으로 구별하는 만남에는 아예 처음부터 생명이 끼어들 틈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현상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과 물질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만남이라는 말에 걸맞으려면 물질의 부딪힘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유일한 만남이어야 합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되풀이 될 수도 없는 너무나 소중한 생명이 완전한 자신의 가치를 갖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모든 만남은 목숨을 걸고 만나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과 목숨을 걸고 만나야 서로의 생명 값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시비왕은 더 이상의 주저를 용납치 않습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든 비둘기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매와 자신의 생명 값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의심치 않기에 저울에 온 몸을 싣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의 차이로 생명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다루는 것이라는 역설(逆說)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만하면...’이라는 논법을 양보치 않으면서,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인심들을 향한 배려를 잊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몸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재보(財寶)를 위해서나 어떤 욕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또 처자를 위하거나 친척과 권속을 위해서도 아니다. 모든 지혜를 구하여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생명의 저울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매와 비둘기 즉, 제석과 비수갈마는 더 이상의 시험을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아마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의 값과 다르지 않게 된 시비왕의 생명입니다.
어찌 하늘의 공양과 찬탄에 끝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미 인연 지었거나 앞으로 인연 질 모든 생명들에게 이렇게 선언합시다.
“놀래거나 겁내지 말라.”
놀란 것은 지금의 현상이지만, 지금에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과거의 위축되었던 생명이 스스로의 생명가치를 믿지 않는 데서 발생합니다.
겁내는 것 또한 지금의 사건이 아닙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 정체입니다.
본래의 생명가치는 세상의 어떤 대상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 나름의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귀중한 생명이기에 말입니다.
한 때의 감상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오로지 서로가 살려주는 가운데, 생명을 생명답게 대접합니다.
이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늘의 공양과 찬탄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부처님께는 수많은 전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비왕(王)이었던 시절의 일입니다.
오직 수행 정진에 매진하는 것만이 왕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칭송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로도 전해져서 마침내 부처님의 법을 옹위하는 제석(帝釋)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료 비수갈마와 더불어 시비왕의 진심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적당히 마음을 떠보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시험이었던 것이지요.
매로 변한 제석과 비둘기가 된 비수갈마가 드디어 연극을 시작합니다.
매에 쫓기던 비둘기가 대중들과 함께 있는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구원을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본 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비둘기야, 놀래거나 겁내지 말거라. 나의 몸이 살아있는 한 끝끝내 너를 죽이지 않고 반드시 너의 목숨을 구호해 주리라.”
물론 진정어린 그러면서도 단호한 대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이라는 보증은 아직 없습니다. 뒤따라 온 매가 던지는 물음은 왕을 생각지도 않던 딜레머에 빠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나의 밥이다.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굶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왕은 곧 자비심을 버리는 게 되지 않겠는가?”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아마 시비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 정도 대응이나 하겠지요.
“꼭 비둘기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고기는 안 되겠는가?”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가 다시 대답합니다.
“상관이 없지만 싱싱한 고기와 피가 아니면, 나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기왕의 죽은 고기라면 어떻게 구해 보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싱싱한 고기와 피가 있으려면 멀쩡한 생명을 죽여야 합니다. 한 생명을 살리자고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면, 이런 모순도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갖가지의 방법을 떠올려 보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마는 그렇다고 내 몸뚱이를 내 줄 수는 없지 않은가요?
아마 여기까지가 우리들이 보통 이야기하는 자비의 한계 같습니다.
그런데 시비왕은 이 한계를 가까스로 돌파합니다.
“매여, 네가 내 몸의 살코기라도 먹으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얼마나 어렵사리 꺼낸 제의인데, 매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다 조건 달기를 잊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몸의 살코기를 저울에 달아서, 비둘기의 무게와 같아야만 내가 받아 먹을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매가 던진 이 한 마디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조금이라도 떼어낸다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상상키 어려운 일이기에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머리카락을 한 올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벌컥 성을 내는 판국에, 이런 큰마음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한껏 기뻐하며 흥에 겨워 춤이라도 출 것만 같습니다.
감흥을 못이긴 왕이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매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때이로구나.”
그러나 대개의 경우 말로만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듯한 약속을 하여서 명분을 획득하고 세상의 찬탄을 받고 나서는 실제로는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한 인생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을 순진하게 믿고는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면서 도움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스러져간 가엾은 사람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표를 노린 공약(空約)이 되는 게 다반사고, 사회사업가를 가장한 인면수심(人面獸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생존을 향한 의지마저 꺾어 놓아 더 이상 일어설 수도 없게 만든다면, 이것이 바로 살생(殺生)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비왕은 수행자입니다. 생명 살리기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 수행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결행합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다리의 살을 거침없이 베어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몸뚱이 살을 보며 어찌 아쉬움이 없었겠는가마는, 자신의 다리 살로써 비둘기라고 하는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거룩한 생각은 그런 망설임을 일거에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분명히 어림짐작에도 비둘기보다 훨씬 많은 양의 살점을 떼어서 올렸건만,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하지만 기왕에 든 칼입니다. 팔을 떼어내고, 등을 베어내어서 저울에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을 텐데 하는 나름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숱한 분노는 이러한 기대의 상실로부터 말미암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픈 사람을 간호하던 식구의 태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과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내 할 도리는 다한 것 같다.”
헌신적으로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뜻과는 엇나가는 아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이만하면 어미의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렇습니다.
‘이만하면...’이라는 자기 삶에 대한 측정이 따라 붙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사람도 견뎌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런 의욕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과 같기에 무엇을 새롭게 시도한다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상대를 향해서 분노의 화살을 당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한 요구를 해 오게 되면, 삿대질이라도 해서 분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한단 말이냐. 너를 위해서 그럼 내가 죽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식의 고함을 지르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쪽의 뻔뻔스런 태도가 클로스업 되는 순간부터, 이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불을 질러버리고 맙니다.
아마 시비왕의 이만한 정성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것도 비둘기라는 새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만큼 하였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마저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렇지만 왕은 약속하였습니다. 반드시 비둘기의 목숨을 구해줌과 동시에 매 또한 굶어 죽지 않게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래의 약속 자리를 떠올려 볼 때, 시비왕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비둘기의 생명이나 매의 생명은 사람의 기준에서 본 하찮은 생명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완전한 생명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셀 수 없을 만치 다양한 만남마다의 성격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해를 끼칠 사람으로 구별하는 만남에는 아예 처음부터 생명이 끼어들 틈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현상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과 물질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만남이라는 말에 걸맞으려면 물질의 부딪힘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유일한 만남이어야 합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되풀이 될 수도 없는 너무나 소중한 생명이 완전한 자신의 가치를 갖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모든 만남은 목숨을 걸고 만나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과 목숨을 걸고 만나야 서로의 생명 값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시비왕은 더 이상의 주저를 용납치 않습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든 비둘기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매와 자신의 생명 값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의심치 않기에 저울에 온 몸을 싣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의 차이로 생명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다루는 것이라는 역설(逆說)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만하면...’이라는 논법을 양보치 않으면서,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인심들을 향한 배려를 잊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몸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재보(財寶)를 위해서나 어떤 욕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또 처자를 위하거나 친척과 권속을 위해서도 아니다. 모든 지혜를 구하여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생명의 저울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매와 비둘기 즉, 제석과 비수갈마는 더 이상의 시험을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아마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의 값과 다르지 않게 된 시비왕의 생명입니다.
어찌 하늘의 공양과 찬탄에 끝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미 인연 지었거나 앞으로 인연 질 모든 생명들에게 이렇게 선언합시다.
“놀래거나 겁내지 말라.”
놀란 것은 지금의 현상이지만, 지금에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과거의 위축되었던 생명이 스스로의 생명가치를 믿지 않는 데서 발생합니다.
겁내는 것 또한 지금의 사건이 아닙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 정체입니다.
본래의 생명가치는 세상의 어떤 대상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 나름의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귀중한 생명이기에 말입니다.
한 때의 감상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오로지 서로가 살려주는 가운데, 생명을 생명답게 대접합니다.
이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늘의 공양과 찬탄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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