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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알라는 말의 속뜻

문사수 2016.09.29 조회 수 11267 추천 수 0

무척이나 골프를 즐기던 어떤 사람이 요즘은 전혀 치지 않는다기에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이 걸작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문외한(門外漢)이 보더라도 골프는 누군가와 함께 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혼자서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인지 친 공이 잘 들어가면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요란스레 손뼉까지 칩니다. 자신이 뜻한 바대로 벌어지는데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반면에 잘 안 풀린다 싶으면 공연히 고개를 처박고는 씩씩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그러고 나면 끝날 것 같은데, 옆 사람이 잘 때리는 것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고 맙니다. 차마 멀쩡한 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라도 하게 되면 겉으로는 짐짓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하지만, 실제로는 흐뭇한 마음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이런 자신을 마주하고부터는 그런 치졸한 연극을 하고 있는 처지가 너무나 불쌍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야 재미도 있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상쾌함도 있었지만, 점차 회를 거듭할수록 남이 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도(度)를 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생각으로 더 이상 골프채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이야기를 한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기 때문에 다 옳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꾸준히 골프장을 찾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 나름대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사하는 바는 사뭇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비근한 예로 바둑 두는 광경을 떠올려 봅시다.

바둑돌을 잡으면서부터 불꽃이 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판을 장악했다 싶으면, 주저하면서 시간을 끌려는 상대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상대를 놀리기나 하려는 듯이,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는 호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우월한 입장이 뒤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낯빛으로 돌변합니다. 타는 입술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빨까지 깨물면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양보를 해달라거나 못해준다는 말투의 거칠고 부드러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피 터지는 싸움과 진배없는데 어찌 적당히 넘어가겠습니까? 엄청난 투쟁심으로 무장한 채, 갖은 음모와 광범위한 전략과 치밀한 전술이 난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침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內面)은 전혀 얌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기고 지는 갈림길에 선 비장(悲壯)함이 느껴지는 것은 총칼을 앞세운 전쟁터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니 바둑판을 두고 마주한 사람이 아버지나 삼촌 혹은 친구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꺾어야 될 적(敵)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살이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나날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처리된다 싶으면 인연 맺은 사람이 살갑게 다가오고, 뒤틀린다 싶으면 상대방에게 섭섭해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한, 좋고 나쁨의 어떤 결과든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헌데 이리저리 휘둘리는 만큼 삶의 내용이 채워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우위를 한껏 뽐내며 사는 모습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자신을 파악할 근거마저 잃고 맙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든 처리해야 할 사건이든, 상대가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드러날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없다고 느낄 때, 허무감(虛無感)에 사로잡히거나 심지어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것은 다 이런데 기인합니다. 그것은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상대할 누군가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못 견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부대끼고 사는 게 그래도 살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산(山)을 오르는 것은 상대가 없이 하는 자신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자신을 상대로 하고 있기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산을 많이 탄 사람들에게서 많이 목격되는 현상이지만, 같은 산이나 같은 코스를 반복적으로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베테랑일수록 굳이 여태까지 가보지 않은 데나 남들이 지나지 않은 길을 새롭게 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지까지 밟아보지 않은 곳을 향하는 설레임과 드디어 다녀왔다는 성취감에 대해서,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한다’고 되뇔 것입니다. 
비록 자신과의 싸움에 묵묵히 몰두하고 있다지만, 가만히 보면 혼자 걷는 중에도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집착이라고 하는 끈끈이를 매달고 다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깥에 있는 다른 누구에 대한 집착이 아닙니다. 더 낫고 더 특별한 삶을 추구하는 만큼, 자신에 대한 상대적인 존재감은 필연적으로 뚜렷해집니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사는 한,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라도 끝내 그 밑변에는 비교된 상대의 세계가 펼쳐질 따름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기를 쓰며 모든 상대적인 조건을 갖추어서 만족된 삶을 꾸리고자 하여도, 매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시도로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쫓기기만 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알고 나면 얼마든지 여유롭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전제(前提)는 있습니다.
조건(條件)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뭣하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면 그만입니다. 그것은 바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속속들이 배인 상대적인 추구의 한계를 참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음을 외면하려한다는 것은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마주해야 합니다. 아닌 것은 어떤 핑계를 들이대더라도 아니듯이, 맞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는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믿은 만큼 세상을 향하여 주장하여야 함은 더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평상시 추구하는 상대적인 추구의 진정한 힘은 자신에게 말미암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스스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태어남 그 자체마저 혼자만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이 앞서 있다가 삶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본래 생명자리를 감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재(內在)되어 있는 참된 생명의 능력이 참으로 현실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는 막연한 꿈이 아닙니다. 삶의 원리 자체가 그러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런 자신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에 상대적인 좌절(挫折)을 맛보게 되는 것인데, 실로 이를 마주함으로써 본연의 자신이 회복됩니다. 좌절이라고 하지만 생명의 좌절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대적인 지향에 대한 미련을 버릴 기회인 것입니다. 눈에 붙었던 비늘이 떨어져야 사물을 제대로 보듯이, 상대적이기에 허망할 수밖에 없는 기대를 접고 참된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흔히 ‘네 주제(主題)를 알라’고들 합니다. 말마따나 상대적인 자신에 대해서 과대포장(過大包裝)을 하거나 혹은 과소평가하는데 바쁘다 보니, 막상 무엇이 삶의 주제인가를 잊고 사는 정황은 지적 받아 마땅합니다.

학교 교실(敎室)의 풍경을 봅시다.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은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같은 교실에 있다고 선생님과 학생이 똑같은 수준일까? 아닙니다. 학생들이 자기네를 기준으로 해서 선생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든 말든, 그것은 선생님 자신의 동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확실히 같은 공간에 있지만 엄연히 차이는 존재합니다.
이렇게 동일(同一)과 더불어서 초월(超越)이 함께 벌어지는 접점에서 현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이란, 스스로의 주제를 돌아보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 경험은 고스란히 참된 삶의 키워드가 됩니다.


설사 아무리 상대적으로 대단한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앞으로의 삶마저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경험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면서, 자꾸만 잘나고 못난 것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있는 모순(矛盾)을 마주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모순을 모순인 줄 아는데 어떻게 더 이상 그런 상태에 머물겠습니까? 이로부터 갖가지의 조건들을 선택하는 참된 생명의 무한(無限)한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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