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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법문듣기
법문을 듣는 것이 불교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대중법문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우린 불자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불자를 불구소생(佛口所生),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난 자. 이렇게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주시죠. 
부처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얘기는 부처님께서 입으로 법문을 설해주시고 그 법문으로 인해서 태어난 자, 부처님의 입에서 법문이 나오면, 그럼 태어나려면 우린 뭐해야 될까요? 네, 법문을 들어야죠.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야지 부처님의 교화를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설법하여 중생을 교화하시는 분이에요. 

그럼 부처님은 법문을 언제 하시느냐? 늘~! 
쉼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중생이 있는 한에서는 부처님이 법문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중생은 끊임없이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야 돼요. 그래서 불자가 돼야 되죠. 그것이 불교신앙의 방향성입니다.  

무량수경에 서분이 있습니다. 그 서분에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삶의 지향이라든지 이런 것들의 중심엔 뭐가 있느냐, 란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법의 북을 치고 법의 나팔을 불며 법의 칼을 휘두르고 법의 깃대를 세우며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의 번개를 번뜩이며 법의 비를 내리고 법의 보시를 베풀어 한결같이 오직 법음으로써 모든 세계를 깨우치신다. 

법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법으로 모든 세계를 깨우치시는데, 어떨 땐 번개가 필요해서 번개 쳐 놀라게 할 때도 있고 또 법으로 위로하실 때도 있는 겁니다. 끊임없이 법을 베풀어서 세상을 깨우치시는 분, 그게 부처님이란 말이죠. 

그럼 법이란 무엇인가? 
회주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법문 중에 ‘불교에는 이것이 꼭 있어야 돼. 불교가 사이비 불교냐. 아니냐는 이것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그건 아누다라삼먁삼보리가 있느냐 없느냐, 에요. 아누다라삼먁삼보리가 없으면 불교가 아니다 그랬단 말이죠. 그 아누다라삼먁삼보리, 범어인데, 그걸 풀면 무상(無上) 평등(平等) 정각(正覺)입니다. 무상(無上), 위가 없어. 위가 없이 평등(平等)해. 그런 바른 깨달음(正覺). 
위가 없다는 말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어야 됩니다. 위가 없단 말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아래도 없다는 얘기에요. 우리가 어려운 말로 그걸 절대라는 말을 써요. 절대적이다. 상대가 끊어진 게 절대니까. 
아누다라삼먁삼보리는 절대적인 생명감, 절대적인 평등성이죠. 부처님은 법으로써 모든 세상을 편안케 하시는데 그 법문의 내용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 절대평등의 세계를 끊임없이 일러주신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고백컨대 상대적인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꾸 상대적인 기준치에 휩쓸려가죠. 절대적인 안목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중생적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삶의 모습은 괴로움이에요. 그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에요. 그래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란 말은 정말 우리의 뼈저린 갈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그 법을 자꾸 들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계속 법문해주시는 이유도 그런 중생의 습을 알기 때문이죠. 자꾸 잊어버리고 자기 습관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그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법문을 주십니다. 

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무한(無限)이란 말입니다. 한계가 없어요. 중생이란 존재는 사실 유한자에요. 유한자는 생멸하죠.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고. 그래서 실체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좋아하고 아끼고 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하고 사라집니다. 그건 유한이죠. 그 유한에다가 우리가 목숨을 걸어선 안 된다. 그래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찾으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 무한을 향해서 가야 되요. 무한을 향해서 간다고 말은 하지만 무한을 향해서 가서 도달할 무한이 있다면, 무한이 없는 공간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무한을 찾아가야 돼’ 하는 말은 그 무한이 없는 데서 있는 데로 가야된다는 거니까 무(無), 한(限), 한계가 없다는 말에 대치되잖아요. 그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은 무한이란 말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시제적으로 지금! 이어야 됩니다. 지금. 지금밖에 없어요. 과거 미래, 뭐 현재란 말도 너무 넓은 의미로 생각되고, 지금, 이 순간밖에 없는 거죠. 
지금 이 순간의 연속이죠. 그게 무한이란 겁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유지하고 있느냐? 무상 평등한 마음을 지키고 있느냐? 절대적인 마음을 견지하고 있느냐? 지금 물어야죠, 자기한테.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시길,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한 세계가 있으니 그 세계가 극락이라. 그 세계에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명호가 ‘아미타’이시다. 금현재설법(今現在說法), 지금도 설법하고 계시느니라.」 

이게 명확한 극락세계와 극락세계에 계신 부처님의 정체성입니다, 지금도 설법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극락정토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는 그 세계에 가고 싶어, 왕생극락(往生極樂). 극락에 왕생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돼요. 
그런데 부처님은 참 자비방편을 주셨어요. 뭐냐? 내 명호를 불러라. 아미타[無量壽 無量光].
그 ‘아미타’에 내 법문이 다 있다. 팔만사천법문이 다 갈무리 돼 있으니까 그 명호를 부르기만 해라. 나무아미타불! 그 명호를 부르면 나의 설법을 듣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부른다는 말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그 원력으로 나무아미타불 명호가 탄생했기 때문에 우린 그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믿는 것이고, 그 법문을 믿고 또 염불을 부르는 것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법문 듣고 계십니까? 했을 때 지금 듣고 계셔야지, 지금 현재 설법하고 계신 분이 부처님이신데 일요일 날 대중법회에 가서 법문 들어요, 가 아니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늘 지금 이 순간, 법문 듣는 염불행자, 그게 불자다. 특정한 때가 아니라 정말 끊임없이 이 순간 들어야 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르면서 듣는 거죠 계속.

정말 우리 24시간 염불하는 겁니다. 놓첬다 싶으면 놓쳤구나 후회할 필요도 없어. 바로 하면 됩니다. 계속 염불이 24시간, 꿈속에서도 염불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 그게 염불행자의 모습이다. 그걸 우리가 한번 정리하시면서 부지런히 염불, 지금 뭐하고 계세요?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정신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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