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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법문

화합和合의 비밀 _ 감사의 날, 추석 맞이 맞춤 법문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방식은 달라도, 나름대로의 생명력인 업(業)의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신업(身業)을, 언어적으로는 구업(口業)을,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의업(意業), 즉 삼업(三業)을 지으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이란, ‘삼업(三業)을 짓고 그에 따른 보(報)를 받는 연속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살고 못사는 것을 따지기에 앞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결단하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바람직한 결과란 그에 걸맞는 원인이 먼저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할까요?
불가(佛家)에서는 예로부터 여섯 가지 조화로운 삶의 양태를 이상적이라고 찬양해왔습니다. 육화경(六和敬)으로 널리 알려진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가 몸으로 화합하여 함께사는 생활을 뜻하는 신화공주(身和共住)입니다.
한 지붕 아래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꿈자리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제각기  다른 세상을 꿈꿉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이상향이 다르니까요. 꿈만이 아니라 몸뚱이 또한 다르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도 서로 다른 사람끼리 화합하여 함께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때 화합은 쉬운 일이 됩니다.

몸뚱이는 자신의 참생명인 법신(法身)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어떤 모습으로 한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제대로 만나는 태도가 아닙니다. 법신과 법신끼리, 아니 다만 법신이라는 한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솔선수범하고 부처님을 대하듯 서로를 법신으로 존중하며 살 때 저절로 화합하고 더불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기 나는 말로 서로를 북돋우는 구화무쟁(口和無諍)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제 자랑을 늘어놓거나 남의 흉을 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노는 입에 염불하라'고 하겠습니까?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키고 말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부처님으로 칭찬할 뿐입니다.
언어(言語)의 힘은 결코 무시할 바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고 말하면, 그에 따라서 감사의 샘이 솟아납니다. 허물없는 친구라고 여겨서 욕하는 식의 말을 자꾸 하다보면, 어느 날 진짜 욕 먹을 행동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입에서 나온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바로 말한 당사자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의 현실은 어두워집니다. 그렇기에 자신뿐만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감사하는 말'과 '칭찬하는 말'로 화합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며 일을 성취하는 의화동사(意和同事)입니다.
작금의 세태는 참으로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주장을 관철하기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자신은 빼놓고 다른 사람들을 온통 독단(獨斷)으로 몰았으니, 어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독단(獨斷)의 횡포를 휘두르는 데 있어서, 본인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세상이 내 뜻에 맞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돌파구는 없을까요?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관점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선택의 열쇠를 본인이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바꾸게 되면 여태까지 미처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의 깊고 넓은 뜻을 존중하여 찬탄하게 되고, 그 찬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더불어 자신의 일이 됩니다.

네 번째는 어떤 조건보다 생명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계화동수(戒和同修)입니다.
율(律)과 계(戒)는 엄연하게 구분됩니다. 율이란 특정 집단에서 지켜야 될 하나의 규범을 가리킵니다. 집안에는 가규(家規)가 있고, 학교에는 학칙(學則)이 있습니다. 그런데 율을 잘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계를 잘 지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계란, 지키고 안지키고 할 게 없는 '생명의 원리'를 뜻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공급되는 양식이나 지식 등과 같은 도움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살지 못합니다. 세상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생명의 원리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계를 삶의 맨 윗자리에 두어야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각자 생명의 고결함과 존중을 잃지 않기에 서로가 더불어 그  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살진데 어떻게 화합이 멀리 있겠습니까? 


다섯 번째는 삶을 이해(理解)하려는 태도를 함께 하는 견화동해(見和同解)입니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견해가 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쳐다보면서, ‘어쩜 그렇게나 다를까?’하며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강 물을 쳐다보면서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럽다고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견해가 다른 이유는 별스러운 데 있지 않습니다. 단지 ‘나’라는 자(者)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그래서 그 '나'를 주장하고 뽐내려고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물질적인 상태도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주인공이며, 상대적인 변화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세상살이는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또 다른 자신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자식이란 이름의 나의 다른 생명이고, 부모라는 이름, 동창이라는 이름, 이웃이라는 이름, 너라는 이름의 다른 생명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일어나는 생명자리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사는 가운데 이익이 있다면 조화롭게 나눈다는 이화동균(利和同均)입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게 있으면 저 먼저 챙기고 봅니다. 그러고 나서 차츰 주변으로 확대해 갑니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등 기존의 인정된 사람 순으로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부터 챙기려고 하니,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그만두고라도, 자기 만족의 끝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언제나 공염불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본래 우린 몸뚱이마저도 원래 내 것으로 갖고 온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준 것입니다. 몸뚱이가 본래 내 것이 아닌데, 이외의 다른 것은 두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억지일 따름입니다.
세상이 살려주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간단해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원칙을 태어나면서부터 살려지고 있다는 데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받음의 결과이고 또 그 만큼 나누어 줄 때 다른 사람의 성취를 북돋운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화경(六和敬)을 누리며 사는 게 어찌 어렵기만 하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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